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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삼행시’에서는 길재 선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 세 번째 이야기로 길재 선생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길재 선생이 남긴 시를 찾아 봅니다.



▲ 야은 길재(1353-1419)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석별가(石鱉歌)

8살 때 아버지가 지방관인 보성대판(寶城大判)이라는 벼슬에 올라 전라도 보성으로 부임을 가게 됐는데 워낙 녹봉이 적어서 온 가족이 옮겨가서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만 함께 가고 길재 선생은 외가에 맡겨졌다. 혼자 외로이 떨어진 소년 길재는 어머니가 그리워 자주 눈물지었다. 하루는 냇가에 나가 놀다가 자라처럼 생긴 돌을 주워 문득 ‘석별가(石鱉歌)’라는 시를 지었다.

가재야 가재야 (鱉乎鱉乎·별호별호)

너도 어머니를 잃었느냐 (汝亦失母乎·여역실모호)

나도 어머니를 잃었노라 (吾亦失母矣·오역실모의)

나도 너를 삶아 먹을 줄 알지마는 (吾知其烹汝食之·오지기팽여식지)

네가 어머니 잃은 것이 나와 같기에 (汝之失母猶我也·여지실모유아야)

그래서 너를 놓아 준다. (以是放汝·이시방여)

이 사실을 이웃에게 전해들은 외조부는 “참으로 효심이 깊고 사려가 깊은 아이가 아닌가. 어린 것이 얼마나 부모가 그리웠으면 이런 시를 짓는단 말인가?”하고 눈물지었다. 어린 소년의 시는 이내 고을 전체에 퍼졌고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 회고가(懷古歌)

망국의 한과 회고의 정을 담다.

회고가(懷古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의 재상들이 변절하여 조선왕조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절개를 지킨 충신들은 망국의 한과 슬픔으로 벼슬과 인연을 끊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길재 선생 역시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로서, 초야에 묻혀 지내다가 폐허가 된 도읍지 개경의 옛 궁궐터를 돌아보곤 자신의 회고를 애끓는 시조로 노래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선산부 지도

속세를 초월해 진정한 행복을 찾다

금오산 대혈사 광한루(金鼇山 大穴寺 廣寒樓)에서

기일(基一) 선산(善山)으로 돌아와 은거하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꿋꿋한 지조와 맑고 깨끗한 내면을 절간의 주위 풍경에 투사한 칠언절구로 담(覃)운이다.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를 통해 세상의 변화에 휩쓸리지 않고 지조를 굽히지 않는 자신의 태도를, 밤낮으로 흐르는 맑은 개울물을 빌려 쉼 없이 마음을 수양하여 도심(道心)으로 나아가려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다. 성리학자의 심성수양은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고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는(遏人欲存天理) 데 있으므로 외물을 빌어 세속적 욕망을 초월한 진정한 정신적 행복의 묘미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표현했다.

봄가을 대나무 빛 절개를 굳게 하고 (竹色春秋堅節義·죽색춘추견절의)

밤낮 흐르는 개울물 탐욕을 씻어낸다 (溪流日夜洗貪婪·계류일야세탐람)

마음의 근원 맑고 고요하여 속기라곤 하나 없고 (心源瑩靜無塵態·심원형정무진태)

이때부터 알겠네, 도의 맛이 감미로움을 (從此方知道味甘·종차방지도미감)

 

길재 선생이 지은 시를 살펴보니 한 구절 한 구절에서 그의 기개(氣槪)와 강단이 느껴지는데요, 다음은 길재 선생 이야기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로 성리학자로서의 길재와 성리학에 대하여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길재 선생의 생애, 유적지, 문학 작품에 이어질 길재 선생의 마지막 이야기에 많은 관심과 기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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